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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비워진 것들의 무늬
저자 | 김백 (지은이)
출판사 | 상상인
출판일 | 2025. 12.08 판매가 | 12,000 원 | 할인가 10,800 원
ISBN | 9791174900326 페이지 | 156쪽
판형 | 128*205*10 무게 | 156

   


김백 시인의 『비워진 것들의 무늬』는 “없는 것들”이 남기는 자국을 더듬어 가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사람의 얼굴이나 사건의 전면보다, 이미 지나가 버렸거나 비어 버린 자리들을 오래 응시한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바람과 강, 바다 그리고 조용한 산사의 풍경이다. 상실과 고통을 정면으로 말하지 않고, 자연의 장면들로 돌아가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 자연에 기대어 천천히 치유의 호흡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정서는 불교적 사유와 깊게 맞닿아 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고 나면 공空일뿐”이라는 구절은 이 시집 전체의 주제를 함축하는 경구이다.
첫 시 「바람의 전능」에서 바람은 “그물에 들지 않고 슬픔에 젖지 않으며 무릎 꿇지 않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존재로 등장한다. 바람은 여기서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니라, 잡히지 않음 자체의 상징이다. 호수의 물비늘, 나이테, 옹이, 손금 같은 구체적인 사물의 질감을 스쳐 지나가면서, 바람은 “착시”이자 “문장”이 된다.
이 시집에서 강과 바다의 상상력은 유년의 기억과 이별의 슬픔 그리고 귀환 불가능한 시간들을 잇는 통로로 작동한다. 「섬진강 기수역에서」 연작이 그 대표적 예이다. 예를 들어 「섬진강 기수역에서 4」에서는 샛강에 핀 갈꽃과 함께, 아버지와 함께 멱 감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버지는 “세상에 가라앉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던 따뜻한 물속의 몸으로 떠오르고, 샛강의 풍경은 “세상 사는 일이 다 들고 나는 때가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강물의 출렁임이 윤회의 숨결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특히 이 시의 불교적 사유는 직접적인 경구가 아니라, 이미지와 장면 속에 스며 있다. 「잠蠶」과 연작시인 「묵연」에서 누에와 고치는 업業과 해탈의 은유로 쓰인다. “생이 단 한 번 깜박거린 잠이라면/사몽四夢은 바람에 나부끼다 스쳐 가는 그림자”라는 구절에서, 삶은 한 번의 짧은 잠, 그 속의 꿈들은 덧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덧없음이 곧 사라짐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 집을 짓고, 그 집이 비워졌을 때 비로소 남는 “빈 절집 한 채”가 있다. 채우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라, 비우기 위해 짓는 집. 그 비움이야말로 자신이 “비워진 것들의 무늬”로 남는 길이라는 생각이 이 시들 전체를 관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불교적 사유가 언어의 층위에서도 구현된다는 점이다. 김백은 동음이의어와 다의어의 결을 자주 활용한다. 「잠蠶」에서 ‘잠’은 수면이면서 누에이고, ‘고치’는 보호막이면서 곧 벗어야 할 껍질이다. 「심우도」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는 길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 길과 맞물린다. 「묵연默緣」에서 ‘연緣’과 ‘연(연기, 연무)’은 인연과 안개처럼 번지는 무늬를 동시에 가리킨다. 이런 언어의 겹침은 세계가 하나의 의미로 단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열리고 비워지는 공간임을 드러낸다. 시인은 단어 하나 안에 여러 층의 의미를 겹쳐 올려, 독자가 그 사이를 왕복하며 읽게 만든다.
『비워진 것들의 무늬』는 강과 바다, 바람과 눈, 고치와 절집, 빈집과 버스 종점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상실과 슬픔이 우리 삶에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 그리고 그 자국을 어떻게 바라볼 때 비로소 치유의 시간이 시작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 시집의 세계에서 비워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오래 남는 것들이다. 그 빈자리의 무늬를 더듬어 읽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조용하면서 오래가는 울림을 건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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