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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상고사
한 상고사 韓 上古史
저자 | 조성훈 (지은이)
출판사 | 북랩
출판일 | 2023. 01.27 판매가 | 25,000 원 | 할인가 22,500 원
ISBN | 9791168366862 페이지 | 618쪽
판형 | 152*225*35mm 무게 | 500g

   


사대주의와 일제 잔재를 벗어나 사료로 우리 고대사를 보다

현재의 역사는 조선총독부가 창작한 소설이다.
이 책이 그 소설성을 입증하고 진실을 밝힌다.
상위 1%의 한국인은 반드시 이 책의 서문이라도 읽어야 한다.


역사는 창작 소설이 아니다. 사료를 통해 과거의 사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정치적 목적이나 타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수상한 목적하에 쓰인 소설이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창작 소설 수준의 유사 역사학이 판을 치고 있다. 필자의 어조가 강하여 거부감이 들더라도 조금만 더 인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필자는 최대한 억제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낙랑군은 조선이 아니라 한나라 영토에 설치된 군이다. 당시 전쟁에 이기면 토착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주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다. 중국 측 사료에 의해 낙랑군이 요동고새 내부의 원래의 한나라 영토에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단군조선이 신한(진한) 마한 변한의 삼한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부여는 추모(주몽)가 도망친 동부여와 비류가 세운 예부여(비류백제)의 두 개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중국 동해안의 백제 유민 세력을 기반으로 하였다. 대화왜는 백제 주민이었던 전라도 왜가 신라로 도망가서 포로로 지내다가 광개토대왕의 명령으로 나라의 고구려 분국에 이송된 피지배민이다. 도대체 야마토라는 왜계 정권이 성립될 여지가 없다. 열도는 가야계의 지배, 백제의 담로 지배, 5세기 백제와 고구려의 남북국 시대, 6세기 이후 백제 지배의 역사를 거친다. 칭기즈 칸은 震國王인데, 이는 그가 大震(발해)을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 백제와 신라의 고향은 황하하류이다.

추모(주몽), 즉 고구려는 한나라의 부용세력으로 출발했고, 유리왕은 왕망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홍산문화는 배달국을 증명한다. 하가점하층문화는 삼한조선(고조선 전기)을 증명한다. 치우는 배달국에서 남하하여 먼저 와서 중국인을 지배했던 황제와 싸웠다. 번조선은 중국 동부를 지배했다. 서언왕은 번조선 남부의 왕이다. 칼돈은 고조선의 화폐이고, 칼돈이 발견되는 곳은 고조선의 강역이다. 만리장성은 북경 남쪽 보정시에서 시작한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정신 나간 환빠의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장은 객관적 사료에 기반하고 있다. 간명하게 기존의 주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아래 사례를 살펴본 후에, 필자가 정신 나간 환빠인지를 판단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삼국지』는 대방군에서 韓을 지나 남으로 동으로 7,000여 리를 가야 김해에 도달한다고 한다. 대방군이 황해도라는 소위 강단사학계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후한서』도 낙랑군의 변경 즉 대방군에서 김해까지 7,000여 리라 한다. 당시에 韓은 황하 하류의 동쪽, 제수의 북쪽이었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韓의 서북쪽이었다.

동천왕은 관구검에게 패하였는데,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에 의하면 관구검은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왕기를 시켜 추격하게 하였고, 추격군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추격하여 관구검기공비를 세웠다. 그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조조의 위나라가 고구려를 통쾌하게 이긴 것을 기록한 것이므로, 크게 왜곡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부분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집안 서쪽 1,000여 리에 옥저가 있었고 그 서쪽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이라는 사서와, 관구검기공비를 무시하고 옥저의 위치와 고구려의 강역에 관해 소설을 쓰고 있다.

『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 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시대 때 서경이라 하였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면서 안북대도호부에 이르러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데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안북대도호부가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라 고려의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 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까지 간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즉 지금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볼 수는 없고 고구려의 평양은 최소한 안주 북쪽에 있었고, 현재의 평양은 각자성석이 밝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漢城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위 강단사학계는 서울 강북이 고구려의 한성이라 하는데, 강북은 주로 백제의 영토였고, 고구려가 점령한 시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국경이 도회지가 되기는 어려우며, 각자성석이라는 명백한 증거에 반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근거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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